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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Homo Auditus] 박수 소리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3-09-14 10:39:06 조회수 175

 

넓은 강당 단상에서 나는 연설을 한다. 박수의 물결이 강당을 덮는다. 내가 손을 흔들자 박수는 천둥으로 변한다.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나는 구름 위로 둥실 치솟는다. 환각인가 싶더니. 일순 급전직하다. 놀라 깨니 꿈이다. 한밤중이다. 어딘가, 여기가? 정신 차려서 보니, 내일 아침 일찍 소백산 등정을 위해 저녁에 투숙했던 희방사 계곡 여관방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박수 소리는 계속 들린다. 자세히 들어보니 계곡의 물소리다. ‘물 흐르듯 번지는 박수 소리!’ 책에서 읽었던 그런 상투적 수사가 떠오른다. 사물과 현상을 언어로 먼저 만나고, 뒤에 체험으로 그것의 진짜를 배운다. 현대인의 듣기 경험이 대개 그러하다.

나는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내 안에 잠자고 있는 권력 무의식이 노출된 걸까. 나는 그런 거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고 사는 편인데, 그러나 모를 일이다. 인간 무의식의 심연을 누가 알겠는가.

박수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박수를 보내는 행위, 박수치기에 대해서는 내용이 넘치지만, 박수를 듣는 행위, 박수 듣기에 대해서는 거의 없다. 함민복 시인이 박수에 떠밀려 앞으로 나갔다라는 시적 고백이 한 조각 보일 뿐이다.

박수는 찬양으로 듣는 것이 통례지만, 박수를 억압으로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박수는 전체주의의 집단 선동에 동원되는 숨은 기제다. 나치 집회의 일사불란한 박수에서 박수치지 않는 자는 반동이다. 박수치지 않는 자를 처형하라.

 

/pixabay

 

팬덤 집단 내부의 박수도, 절대 찬양의 정서로 오갈 데 없는 전체성을 조장한다. 박수를 유도하는 박수 바람잡이는 또 얼마나 많은가. 쇼를 지배하는 내부의 지략가들이다. 각성된 대중은 이제 이들에게 박수치지 않는다.

박수를 환희로 듣는 것도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박수 중독, 그 환각이 무섭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의 구심에 섰던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환상의 유혹은 유세장에서 들려오던 박수라고 하지 않는가.

박수는 누가 치는가. 박수의 위력과 매력은 불특정 다수 대중의 호응이라는 데서 인정된다. 불특정 다수의 실체를 특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박수치는 군중이라고 하면, 제법 근사(近似)한 답이 될 법도 하다.

유세장 공터에서 나에게 박수를 치던 불특정 다수는 나를 언제까지 지켜 줄 것인가. 그들은 나를 일관하여 책임지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박수는 일종의 소비재이다. 정치는 박수를 일시적 선전재(宣傳財)로 소비한다. 동시에 박수는 박수를 감정으로 소비하는 대중의 심리적 소모품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중심에서 영욕의 길을 다 걸었던 한 노정객은 만년에 자신의 정치를 허업(虛業)이라 했다. 박수에 중독이 된 사람들, 박수 소리가 허성(虛聲)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중요한 것을 다 잃어버린 때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떤 박수를 듣고 있는가. 박수 소리 화창하게 들릴 때, 떠날 때를 헤아려야 한다. 그 박수 소리의 유효함을 위하여! /경인교대 명예교수·한국독서학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