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미국의 팝송 보컬 사이먼과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이 불러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노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는 가사의 의미가 자못 중층적(重層的)이고 철학적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생각에 묻혀 침묵이 전하는 소리를 들어보라는 메시지가 전경(前景)으로 놓인다. 대화의 진정함이 사라지고, 말이 타락하는 인간 군상(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을 지적하며 침묵의 가치를 암시하기도 한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경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침묵’은 자연 세계의 ‘고요함(적막함)’과는 달리 인간의 의지적 소산으로 생겨난 ‘무음 상태’이다. 그래서 침묵은 인간 존재의 의미심장함을 깨닫게 하고, 피할 수 없이 철학적 반성을 향하게 한다. 자발적 침묵이든 강요된 침묵이든, 인간의 침묵은 성찰의 주제로 직결된다. 침묵은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고뇌가 깊어질 때, 생각이 고여 드는 깊은 저수지이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는 ‘침묵의 대변성(代辯性)’은 곧 침묵의 힘이기도 하다.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이 남긴 명언,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를 말하기의 지혜로만 여기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식이다. 이는 듣기의 지혜로도 유효하다. 그 누군가의 침묵을 들어야 할 때, 듣는 쪽에서도 다소간 ‘침묵의 말미’를 가지면 어떨까. 상대의 침묵을 다그치지 말고, 그 침묵의 내용을 즉각 포획하려 들지 말았으면 한다. 듣는 쪽에서도 상대의 침묵을 내 안에서 우려내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의 메시지에 매달리기보다는 그의 인간적 고뇌를 헤아려 보는 쪽으로 나의 듣는 태도를 정해 나가면 어떨까?
세상의 말은 ‘백색의 자극성’을 더해 가고, 말의 기술은 더욱 교묘하여, 아무 맥락에나 내 편의 선전 선동을 집어넣으려고 기를 쓴다. 침묵이 없으니 침묵을 들을 기회도, 배울 기회도 없다. 자라는 세대가 무엇을 배울까. 학교 교육과정이 ‘침묵 배우기’의 길을 보여 줄 수는 없을까.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국제PEN한국본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