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盟誓)’와 ‘기록(記錄)’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맹세는 알겠는데, 기록이라니요? 아, 그거, 운동선수나 천재들이 세우는 신기록 같은 거, 그런 기록 말입니다. 아니, 그게 서로 무슨 상관이 있다고, 공통점을 따질 일입니까? 얼른 생각이 안 떠오르시죠. 가르쳐드릴게요. 그게 말입니다. 둘 다 깨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그게 맹세와 기록의 공통점입니다.
내가 생각을 보탠다. 깨진다는 공통점 안에 양자의 차이점도 있다. 기록이 깨진다는 데는 인간의 긍정적 상승적 이미지가 있다. 신기록에 부단히 도전하는 인간 승리의 모습인지라 흔연하다. 그런데, 맹세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니…. 지조가 쉽게 흔들리는 인간, 그 불편한 진실을 냉소적으로 꼬집는다. 부정적 인간의 이미지와 맞닿는다.
맹세는 무엇으로 하는가. 마음으로 한다. 맞다. 하지만, 이는 맹세하는 사람의 심적(心的) 태도이므로, 눈으로는 잘 안 보인다. 맹세를 구체적 현상과 구체적 의식(儀式)으로 드러내는 것은 ‘말’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이루어지는 맹세는 없다.
맹세라는 한자어에 ‘말씀 언(言)’이 들어 있는 것은 맹세가 말로써 이루어짐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세는 언약(言約)의 일종이다. 맹세의 징표로 단단한 돌이나 쇠를 대령하여도, 그것은 언약을 돕는 보조에 불과하다. 기껏 거기다 언어를 새기는 데에 이바지할 뿐이다.
맹세하기에 대한 충고는 넘쳐나지만, 맹세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조언이 없는 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1940년에 백년설이 노래했던 가요 ‘번지 없는 주막’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정든 사람과 헤어지는 정경이다. 떠나는 화자는 사랑의 마음 변치 않겠다고 길게 맹세한다. 그러나 이 맹세를 듣는 상대는 ‘못 믿겠소’를 연발한다. 그녀는 인간의 맹세가 깨어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이미 터득했음인가.
굳은 맹세일수록 우리는 하늘[신]을 두고 맹세한다. 여기에 성서의 한 구절도 따라붙는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레위기 19:12) 인간이 거짓 맹세에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신은 진즉부터 알았는가. 인간의 맹세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국제PEN한국본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