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해져 가는 가을에 영화 딱 한 편만 보고 싶다,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19일 개봉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2022년작 ‘플라워 킬링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어느덧 80이 넘은 스코세이지의 영화적 시선이 이번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머물렀다. 영화는 인디언을 부(富)의 제물로 삼은 백인들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굴착한다.
#연쇄살인 미스터리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주 페어팩스 한 마을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3년간 최소 24명이 살해됐는데도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연방정부에서 수사팀을 구성하는데 이것이 FBI의 출발이다. FBI가 개입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난다. 원작은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플라워 문: 거대한 부패와 비열한 폭력, 그리고 FBI의 탄생>. 2017년 아마존 ‘올해의 책’ 1위인 이 책을 스코세이지에게 소개한 이가 제작을 겸한 주연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검은 황금
오세이지족은 1870년대 원래 살던 캔사스주에서 쫓겨나 페어팩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내몰렸다. 남북전쟁 후 200여 명의 오세이지족은 이 땅을 아예 사버렸고, 땅의 광업권을 가지게 됐다. 1890년대 ‘검은 황금’ 석유가 터져 나왔다. 오일 머니 돈벼락을 맞은 오세이지족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백인들을 부린다. 값비싼 양복으로 차려 입은 원주민들은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타고 운전은 백인이 한다. 백인들은 호시탐탐 어떻게 하면 이들 재산을 빼앗을까 궁리한다.
#택시운전사 어니스트
영화는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1차대전 참전 후 별볼일 없이 지내던 어니스트는 페어팩스에서 큰돈을 벌었다는 삼촌뻘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을 찾아가 일자리를 구한다. 헤일이 권한 것은 택시운전사. 몰리를 태워 유혹하면 너도 부자가 될 거야. 글도 잘 못 읽고 대체로 아둔한 어니스트지만 외모는 좀 자신있다. 결국 몰리를 유혹하는 데 성공,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셋 낳는다. 하지만 원래 목적은 뭐? 부자 되는 것. 헤일이 설계한 ‘인디언 사냥’의 하수꾼이 된다.
#오세이지족 몰리
몰리(릴리 글래드스톤)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에 이어 언니 애나, 동생 리타와 미니가 차례로 죽음을 맞는다. 미니는 병으로, 애나는 살해당하고, 리타는 폭탄이 터져 불에 타 죽는다. 몰리는 절규한다. 가족을 몰살한 범인을 찾기 위해 탐정을 고용한다. 어니스트는 앞에서는 몰리를 응원하는 척, 뒤에서는 방해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부자가 되는 것. 그러나 딸 애나가 죽는다. 이제 절규하는 것은 어니스트다. 몰리는 실존 인물이며, 몰리 역의 릴리 글래드스톤은 오세이지족은 아니지만 원주민 출신이다.
#탐욕의 지휘자 헤일
탐욕의 설계자이자 지휘자 헤일(로버트 드니로). 그는 몰리 어머니의 유산을 목적으로 몰리 주변사람들을 차례차례 살해한다. 석유 로열티로 오세이지족에게 금이 돌아가지만 재산관리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후견인이 관리한다. 따라서 소유주와 일가가 죽으면 후견인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점잖은 은발의 신사, 오세이지족을 위하는 척하는 헤일은 잔인하게 오세이지족 사냥을 진두지휘 한다. 드니로는 겉으로는 자상하지만 속은 탐욕으로 가득찬 백인 남자를 그답게 연기한다. 갈수록 공포를 발산, 그가 정장 입은 악마로 나오는 영화 ‘엔젤 하트’를 떠오르게 한다. ‘더 웨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렌든 프레이저가 악질 변호사 해밀턴으로 가세한다.
#플라워 문
플라워 문은 인디언들이 5월에 뜨는 보름달을 일컫는 말이다. 인디언들은 봄 특히 5월을 꽃을 죽이는 달로 부른다. 먼저 핀 4월의 작은 꽃들이 5월의 키 큰 꽃들에게 양분을 빼앗겨 서서히 죽어간다는 인디언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제 ‘킬러스 오브 플라워 문’은 ‘보름달의 살인자’라는 뜻인데, 국내 제목이 ‘플라워 킬링 문’ 즉 ‘꽃을 죽이는 달’로 바뀌었다.어쨌든 ‘플라워’는 자신들의 터전을 침범한 백인들에게 살해당한 오세이지족을 은유한다.
☞스코세이지와 드니로와 디카프리오=이 영화는 세계 영화사의 ‘희귀템’이다. 스코세이지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두 배우가 한 작품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스코세이지와 드니로는 50년지기. 둘이 만난 건 1972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소개를 통해서였다. 드니로는 ‘택시 드라이버’ ’레이징 불’ ‘좋은 친구들’ 등 주로 스코세이지 초·중기 영화에 출연했다. 바톤을 이어받은 디카프리오는 ‘갱스 오브 뉴욕’부터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까지 총 5편, 이번이 6번째 스코세이지와의 작업이다. 두 배우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것은 ‘디스 보이스 라이프’(1993) 이후 30년 만이다.
☞스코세이지 BIG 5=‘범죄와의 전쟁’ 윤종빈 감독은 ‘좋은 친구들’을 100번 이상 봤다고 했다. 필자도 100번 이상은 아니어도 스코세이지 대표작은 거의 봤다. 특히 날것 같은 서늘함이 있고 시니컬하지만 유머가 있는 초기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마음대로 스코세이지 빅5를 꼽아 본다.
1.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1976): 1970년대 뉴욕, 베트남전 참전 후유증으로 불면증에 걸린 택시운전사가 사회 부조리를 척결하려 나선다. 모히칸 머리를 하고 거울 앞에서 손가락 방아쇠를 당기는 드니로, 당시 10대로 창녀 역을 한 조디 포스터가 여전히 선명하다.
2. 레이징 불(Raging Bull·1980): 몰락한 세계 미들급 챔피언 제이크 라모타를 드니로가 연기, 영화사상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인간의 질투를 가장 비통하게 그려낸 영화"라고 평했다.
3. 특근(After Hours·1985): 소호로 가는 택시를 탄 폴이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변덕스러운 여자 마시와 엮이면서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 스릴러. 봉준호 감독도 가장 좋아하는 스코세이지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
4. 좋은 친구들(Goodfellas·1990): ‘대부’가 드라마틱하고 웅장한 마피아 드라마라면 ‘좋은 친구들’은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갱스터 무비다. 1955년-1980년대를 배경으로 갱스터가 꿈인 친구 5명이 갱스터가 된후 겪는 일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멋있기는커녕 조잡하고 유치하고 범죄 사기 폭력이 전부인 리얼 갱스터 세계다.
5.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2013): 잘 생기고 언변 좋고 똑똑한 조단 벨포트는 주가 조작으로 부자가 되고 FBI에 추적당한다. 스코세이지가 연출하면 디카프리오 연기도 달라진다는 것을 입증한 영화. /유청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