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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Homo Auditus] 진양조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3-10-18 12:31:42 조회수 149

 

일제 강점기인 1941, 가수 백년설이 부른 노래에 만포선 길손이라는 가요가 있다. 뒤에 이미자가 부르기도 했다. 만포선은 평남 순천에서 북으로 달려 압록강 만포에 이르는 300의 철길이다. 강을 건너면 북만주 벌판으로 간다. 노랫말에 진양조가 나온다. 

 

만포진 구불구불 육로길 아득한데

철쭉꽃 국경선에 황혼이 서리는구나

톳자리 주막방에 목침을 베고 누워

흐르는 진양조에 내 사랑 그리워진다

날이 새면 지향 없이 떠나갈 양치기 길손 

낭림산 철쭉꽃이 누렇게 늙어간다

당신이 오실 날짜 강물에 적어 보냈소

명마구리 울어울어 망망한 봄 물결 위에

님 타신 청포 돗대 기다리네 그리네 

 

나는 이 노래 가사에 호출된 진양조란 말이 참으로 진양조에 여실한 분위기로 와닿는다. 유랑의 시대 타관 객지 주막 방에 누워 듣는 진양조’, 그 곡조에 서리는 방랑과 한의 에스프리는 식민지 백성의 긴 한숨이고 깊숙한 신음이다. 애틋하고 애잔하고 좀 구슬프다. 정처 없는 길 위에서 쓸쓸히 탄식하는 자아를 진양조로 불러서 데리고 오는 데에 그 음률의 깊은 맛이 있다

 

해남 땅끝마을 바닷가. /이지은 리포터

 

진양조는 느린 장단으로, 한국인의 슬픔이나 한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장단이다. 판소리 춘향가의 십장가나 옥중가, 그리고 심청가의 심봉사 부인 곽씨 부인 유언 대목 등이 진양조에 실려진다.  

진양조는 알게 모르게 세계성을 띠고 있다. 외국인들은 진양조에서 한국적 한의 숨은 형질을 초월적으로 감득하는 듯하다. 나는 판소리의 주조를 진양조에서 감촉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명제에 가장 근사하게 가 닿는 무형의 소리 문화 자질이 진양조라고 말하고 싶다. 

진양조를 듣는다. 꼭 판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쓸쓸하고 슬픔이 겨우면, 내 안에서 그 무엇이 흘러 나와서 스스로 탄식이 되기도 하고, 그 탄식이 나를 어루만지기도 한다. 내가 어떤 곡조를 진양조로 슬프게 듣는 동안, 또 다른 내가 조용히 나를 불러서 다독인다. 단언컨대 진양조는 쉽사리 한국인 곁을 떠나지 못하리라.  

어릴 적 할머니는 근심이 깊어지면 당신 혼자서 무언가 느리고 처지게 웅얼거리셨다. 그럴 때는 찬송가조차도 진양조의 리듬에 실렸다.  

처연함이나 슬픔이 마냥 나쁘지는 않다. 슬픔도 힘이 된다. 진양조를 들으면서 만해(卍海)님의 침묵한 구절을 마음에 품는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경인교대 명예교수·한국독서학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