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도민일보=김미진 기자] ‘포도시’는 ‘겨우’, ‘가까스로’, ‘아슬아슬하게’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엄마의 일기장에는 이 ‘포도시’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올케에게 시집살이를 당했어도, 얼굴도 모르는 가난한 농사꾼에게 시집와 별의별 농사를 지어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워내면서도, 이제는 어디 한 군데 안 아픈 날이 없고 꼼짝하기 싫다면서도 자식들을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은 우리의 엄마는 ‘포도시’ 오늘을 살고 있다.
‘포도시, 말임씨’(도서출판 소락원, 1만2000원)는 1940년에 태어나 84년을 살아낸 김말임 씨의 입으로 듣는 인생 이야기다. 둘째 딸 서명순 씨가 엄마의 말에 글을 덧붙였다. 마치 시골 할머니의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는 것 같은 생생한 전라도 사투리는 읽다 보면 저절로 입으로 따라 읽게 된다. 전라도 사투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잘 안 읽힐 수도 있지만, 질곡의 시간을 견디어 온 말임씨의 눅진한 이야기는 동시대의 어머니와 자녀들에게도 공감할 만한 경험이라 흡입력이 그만이다.
1장에서는 말임씨가 딸만 조르르 셋을 낳고 아들 둘을 낳아 키우며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지나 오늘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큰아들을 먼저 보내고 날마다 눈물로 보내야 했던 이야기에 가슴이 저린다.
2장에서는 말임씨가 초등학교 다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한국전쟁 전후 혼란스러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처녀 시절 4H 활동을 한 이야기까지 근대사가 오롯이 담겼다.
3장은 시집와서 아버지와 농사지으며 살아온 아련한 이야기들로, 4장은 살다 보니 좋은 날도 있었고, 다정하고 듬직한 손주들 덕분에 “호강시런 할매”라 말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말임 씨의 못다 한 이야기를 담았다.
실명이 마구 공개되는 솔직하고 사적인 글은 우리 집에서나 옆집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삶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고 나만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SNS에서는 눈만 돌리면 나보다 잘난 사람, 잘사는 사람이 천지인 것 같아 속이 상한 당신에게 ‘포도시’ 84년을 살아온 말임 씨는 이 세상에 이런 삶도 있다고, 이렇게 살아낸 인생도 있다고 말을 건다.
저자 서명순 씨는 가난한 시골 살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사범 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30여 년의 보람찬 교직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팔순이 넘은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글이나 사진으로 무엇이든지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https://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42811, 2023.10.11